1995년 여름 장 제스 공항. 우리는 홍콩 항공기로 도착했다. 서울에서 2시간도 안 되는 거리이지만 한국 항공은 대만에 취항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우방이다 혈맹국이다 하며 가깝게 지내던 한국과 대만이 국교를 단절한 것은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를 맺은 직후였다.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 촬영팀 하나가 대만 영화를 찾아온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슬픈 도시' 라고 불렀던 그 땅을.
양 더창 감독의 인터뷰가 도착 당일 있었다. 스태프들은 바쁘게 장비를 점검한 뒤 공항에서 곧장 렌터카를 빌려 몰기 시작했다. 중화민국이라는 국명의 대만. 보통 사람에게는 작은 섬나라로, 장 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오랫동안 독재정치를 해오다가 1989년에야 계엄령을 해체한 국가로, 중소기업이 잘 발달한 외환 보유고 1위의 경제대국으로 알려져 있는 나라이다. 영화인들이라면 시장이 적은 까닭에 영화산업이 영세하고 정부의 정책 영화나 멜로드라마가 주류인 그런 곳으로 알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대만 영화가 1980년대 초부터 뉴 웨이브 영화로 세계무대에 성큼 등장했으니,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뚜렷한 영화 전통도 산업도 없는 분단국 대만이 세계의 영화 강국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놀라움에 가까웠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낭트영화제, 로카르노영화제 등에서 연이어 수상하더니 최근까지도 주요 영화제들을 휩쓸다시피 하고 있다. 굵직한 예만 든다면,
-1989년 허우 샤오시엔 감독 '비정성시'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1991년 양 더창 감독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낭트영화제 감독상
-1994년 리 안 감독 '결혼피로연'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
-1995년 차이 밍량 감독 '애정만세'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그리고 1996년에는 콜럼비아사가 제작하고 리 안이 연출한 '센스 앤 센서빌리티' 가 베를린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한 나라의 영화를 평가할 때 영화제 수상만이 절대적인 잣대일 수는 없다. 새로운 대만 영화의 독보성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바탕을 둔 아시아적인 주제와 형식으로 세계를 정복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은 중국 본토의 그림자에 가려진 섬나라 조국의 역사에 끈질기게 매달리면서 동양적인 형식미라는 두렷한 개성으로 아시아 영화의 자존심을 세웠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1980년대 대만 영화가 탄생환 과정은 현대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만 영화를 찾아왔다. 어쩐지 한국 영화의 속사정과 닮은 점이 많은 대만 영화의 성공 원인과 과정, 그리고 현주소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에 허우 샤오시엔과 양 더창을 중심으로 태어난 대만 뉴 웨이브 영화에 얽힌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찾아, 1990년대에 새롭게 세계를 정복한 리안, 차이 밍량 등의 감독들을 찾아 우리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여러 나라에 새로운 영화 운동이 있었지만 그 성격은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도착 다음 날 만난 평론가의 말을 빌려 대만 뉴 웨이브 영화란 무엇인가를 먼저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대만인들에게 뉴 웨이브 1세대 중 가장 중요한 감독을 뽑으라면 늘 3인방이 등장한다. 흔히 대만 영화계의 쌍두마차로 불리는 허우 사요시엔과 양 더창이 있고, 우리에게 친숙하지는 않지만 '허수아비' 같은 명작을 만든 왕 퉁이 그 장본인이다.
타이베이 시 광복로 남가의 원자 영화사. 키가 185cm를 훌쩍 넘고 몸이 마른 동안의 양 감독과 스태프들이 골목에 나와 맑은 웃음으로 맞았다. 마침 친구를 배웅하는 참이었다는 그의 곁에는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에다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알고 보니 대만 뉴 웨이브를 가능케 했던 주역의 하나인 시나리오 작가 우 니엔전이었다. 당장 인터뷰하고픈 마음을 누르고 아쉽지만 곱게 돌려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곧 만날 사람이니까.
조그만 2층집을 창고처럼 개조한 영화사 내부가 시끌벅적하다. 마침 신작 '마장' 의 연기 연습이 있는 날이다. 젊은이들을 다룬 영화인 탓에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남녀 배우가 대사를 외우느라고 바쁘다. 그중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서 어린 주인공 샤오쓰 역을 맡았던 장 젠이다. 이젠 체격도 우람하고 잘생긴 청소년이 됐다. 양 더창과의 인터뷰는 이 작품에서 시작했다.
데뷔 후 거의 25년 동안 6편의 장편만 만든 과작의 양 더창. 새로운 대만 영화의 대표 감독으로 늘 인정받고 있지만 그가 거장의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작품이 바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이다. 제작 기간 5년에 등장인물이 80여 명이나 되는 이 4 시간까지 대작은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와 함께 대만 뉴 웨이브의 최고봉이자 결산으로 평가받는다. 낭트영화제 감독상, 중국 금마장영화제 그랑프리, 동경영화제 심사위원상 등이 이 1947년생 감독에게 돌아갔다.
흔히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은 지금까지 대만 모더니즘 전통의 선두 주자로서, '도시파'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 도시의 분석에 관심을 두던 양 더칭이 대만 역사를 직접 다루게 된 전환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대만 현지에서 만나본 그의 작품세계는 늘 대만인의 정체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의 영화는 '도시' 와 '성장 경험' 을 바탕으로 대만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이었다.
홍콩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 황 지엔위는 양 더창 감독에게 유별난 관심을 보인다. 양 감독의 연구서를 출판하기도 한 그는 뉴 웨이브의 초기 특징을 '성장' 이란 말로 요약한다.
굳이 족보를 따진다면 첫 뉴 웨이브 영화는 1982년에 제작된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이다. 이 영화의 공동 연출자로 첫발을 내디딘 양 더창은 새로운 대만 영화의 1번 타자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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